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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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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 계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公主)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원나라와의 왕실 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양국의 우호관계를 튼튼히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권신들의 세력에 억눌려오던 왕 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등이 퍼지게 되었다. 충렬왕 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려 때에는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특히 충렬왕은 몽고에서부터 매사냥을즐겨한 터라 그것을 하고 싶어 못견뎌했다. 국영 매방[鷹房]이 서울인 개경에 있었다.

그런데 사육하는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하여 피해가 커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왕은 응방 책임자였던 이탁(李擢)에게 명령하였다.

“네가 좋은 매방 자리를 찾아 보아라. 나는 매사냥을 못하면 살 수가 없느니라.”이탁은 머리를 조아렸다.“꼭 좋은 매방 자리를 찾겠사옵니다.”그는 부하 박향(朴鄕), 윤수(尹秀)와 함께 장소를 물색하던 중 부평 계양산의 큰 고개까지 왔다.

“ 여기에 꿩과 산비둘기가 지천으로 많지 않느냐? 산아래로는 서해도 보이고 얼마나 좋으냐?”

이탁의 말에 두명의 부하도 동의 했다.

“ 그렇습니다.전하께서몹시좋아하실것입니다.”

충렬왕은 보고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

바다가 보이고 경관도 좋고 산도 좋고 사냥감도 많단 말이지?”

“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럼 당장 거기에 매방을 만들거라.”

왕이 명령 했다.

그리하여 몇달만에 계양산에 국영 매방이 생겼다. 왕은 다섯차례에 걸쳐 이곳을 다녀갔다.

어느 해가을 ,왕은 왕비인 제국공주를 동반하였는데 왕비는 사냥을 싫어 하였다.

그런데도 따라나선것은 왕이 후궁 무비를 총애하는 것이 싫어서 였다.

임진강을 건너고 김포통진에 도착해 하루를 묵었는데 제국공주는 숙식이 불편하다며 노여움을 터뜨렸다.

“ 전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임무인데 어찌 사냥만을 즐기십니까. 그리고 왜 나를 이 불편한 곳까지 데려와 고생 시킵니까.”

왕은 말한마디도 못하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경명현에 도착하고서도 왕비는 매방책임자 윤수를 꾸짖었다.

“이곳에는 꿩은 커녕 거위 한마리 없는데 왜 전하에게 사냥을 권하여 나까지 험한길 을 오게한 것이냐?”

그리고 충렬왕에게 또 다시 쏘아 붙였다.

“ 전하가 사냥꾼 두목입니까? 왜 제왕이 왕도를 놓아 두고 이런데 나온단 말입니까?”

충렬왕은 분하여 서리가 하얗게 깔린 풀밭에 그냥 주저 앉았다.

“ 그래도 내가 고려땅에서는 제왕인데 공주는 말을 함부로 합니까?”

“ 왕비가 왕을 걱정하고 나라를 걱정하 는말을 함부로하는 말이라고한다면 나는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합니다.”

걸핏하면 제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는 제국공주 앞에서 충렬왕은 힘이 없었다.

공주가 돌아가면 원나라 황제는 책임을 물어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거나, 군대를 보내 제압 할 것 이었다.

왕은 묵묵히 앉아서 풀밭을 들여다 보았다.

충렬왕은 제국공주와 충돌하면서도 그 뒤에도 기어이 계양산에 왔다. 그는 오랫동안 몽고에서 지내 말을 잘 탔는데 그래서 때로는 말을 몰고 달리 며 활을 쏘아 노루와 멧돼지도 잡았다. 그리고 이 곳을 자랑스러워해서 원나라 사신을 동반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지명 계양을 길주목(吉州牧) 으로 승격시켰다.